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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2일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3회의 주제는 6.25 70주년 기념 특집인 <서울.서울.서울> 2편 과 <사이판 특집> 1편 이었습니다. 

선녀들은 서울 전쟁 기념관으로 찾아가 6.25당시의 상황을 복습했는데요. 

 

오늘의 생밀정 한국사 - 6.25전쟁 서울 편 / 사이판 편 시작합니다. 

 

*자료 정리는 선을 넘는 녀석들, 국정교과서(7차)를 토대로 작성하되, 추가 정보를 조사하여 첨삭 합니다. 개인의견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6.25이후의 식량부족

197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겪었다. 

국제 원조로 배급된 밀가루와 옥수수가 주였다. 

밀가루를 이용한 수제비와 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며칠 째 수제비만 먹은 날이었다. 올케는 수제비 양을 늘리는데 천재적이었다. 이 지벵 김장김치는 넉넉했으므로, 김치를 듬뿍 썰어 넣고 국을 끓이다가. 수제비는 조금밖에 떠넣지 않았다. 쫄깃한 수제비 건더기인줄 알고 씹으면 시큼한 김치 줄거리였다. 내가 올케 입장이라면, 부엌에서 배불리 훔쳐먹고 상을 들여갔을 것이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선녀들이 찾은 전현무 추천 단골

함흥냉면 집

 

<오장동흥남집 본점>

 

*게시된 업체와 성업적 관련이 없습니다. 단순정보제공

 

위치(주소)

서울 중구 마른내로 114

(서울특별시 중구 오장동 101-7)

 

출처:오장동흥남집

*주차, 매장 안내 - 홈페이지

 

 

오장동 함흥냉면의 유래

- 6.25전쟁 직후 북쪽에서 온 실향민이 모여 살던 오장동. 

그런 이유로 오장동이 함흥냉면으로 유명해졌음. 

 

전쟁기념관 

 

위치

-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9 전쟁기념관

(월요일 휴무)

- 코로나19 휴관안내 > 홈페이지

 

 

 

6.25 한국전쟁 UN 참전국

-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토고, 뉴질랜드, 필리핀, 터키, 태국, 남아프리카 연방, 그리스 왕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에티오피아 제국, 콜롬비아, (의료 -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6.25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지만,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 한반도.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결렬. 

결국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5.10 총선거. 제헌국회 구성. 헌법 제정. 대통령 이승만)

북쪽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1948년 9월 9일)

2년 뒤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

 

6.25전쟁 발발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북한은 남한을 침공하기 위하여 소련으로부터 전투기, 전차 등 공격용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 

반면 국군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 노후장비를 인수하였으나, 단 한 대의 전차, 전투기도 갖고 있지 못하여 북한군을 막아낼 역량이 되지 못함. 

(남한 병력 105,752(전차 X. 항공기 22대), 북한 병력 198,380(전차 242대. 항공기 226대)

*한국 최초의 전투기  F-51 무스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

 

 

6.25전쟁 발발 한 달

낙동강 유역까지 밀린 국군.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됨.

수도 서울을 되찾기 위해 맥아더장군의 조치는 인천상륙작전(1950.9.15)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

 

인천상륙작전의 숨겨진 이야기

낙동강 전선을 피해 인천으로 향한 UN군. 

상륙확률은 1/5,000.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이었지만,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서해안. 

밀물 시간에 맞춰 7만 5천여명의 부대가 상륙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해협도 좁아 일자로 들어가야 함. 기습공격에 취약한 지리적 요건. 

수심이 깊어지는 밀물 때 상륙해야 하는데, 자칫 교전으로 시간이 지체되기라고 하면 썰물 때가 돼서 갯벌이 되는 서해안. 

정확한 때를 맞추지 못하면 실패. 

칠흑같은 어두운 밤바다. 

선발대가 팔미도의 등대를 먼저 점령한 후, 등대의 불빛을 비춰줘야 작전 수행이 가능. 

결과적으로는 성공.

인천에 상륙 후 김포공항을 점령.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 포항시

 

태극기 휘날리며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을 되찾기 위해 진격하는 국군. 

당시 전시작전권은 유엔군에게 있었는데, 점령한 곳 마다 꽂힌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 

한국 해병대 박정모 소위의 결단. 당시 작전 계획상 중앙청은 유엔군이 점령하기로 했는데, `되찾은 서울엔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태극기를...!!`

서울 수복 하루 전 1950년 9월 27일 새벽 3시 부하 3명(이등병, 훈련병)은 태극기를 품은 채 중앙청으로 향함. 

어두운 새벽 아직 탈환되지 않은 중앙청에 잠입. 북한군과 교전.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중앙청에 태극기 계양.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과 대한민국 해병대의 용기와 애국심을 높이 평가한다.` 미국 해병대에게 표창을 수여한 트루먼 대통령. 

박정보 `저는 사실 그날 한게 없습니다. 목숨을 건 팀원들. 조직원들의 공입니다.` 부하들에게 표창을 넘겨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탈환. 

 

 

남겨진 서울 시민들, 반복된 비극

서울 시민들의 지울 수 없는 흉터 부역자 처벌. 

애매했던 부역자 처벌의 기준. 

`국민을 기만하고 도망갔다 돌아온 주제에, 국민에 대한 사죄와 의무대신 승자의 오만과 무자비한 복수가 횡행한게 9.28 수복 후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지고, 생생하게 억울하다. `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있다>(박완서)

`인민군 밥해준 것도 죄라고 사형시키는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이래 죽이고 저래 죽이고. 여기서 빼가고 저기서 빼가고 지금 서울엔 쭉정이 밖에 더 남았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박완서)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수히 죽어간 국민들. 

불편하지만, 가슴에 새겨야 할 전쟁의 상처.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역사를 위해서. 

6.25전쟁으로 발생한 전쟁 고아만 약 5만~10만(추정)

 

슐레이만과 아일라 -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MBC)

 

6.25전쟁 속 피어난 기적 아일라

터키 군인 슐레이만. 마을 주민들이 사살된 뒤. 유일한 생존자였던 한 소녀. 부대로 데리고 온 슐레이만. 

터키어로 `달`이란 뜻의 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줌. 6.25전쟁이 끝나가자 본국으로 소환된 슐레이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터키로 돌아감. 

MBC PD(황병훈 PD)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다 둘의 만남이 성사됨. 

슐레이만은 몇 장의 사진과 함게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사업회를 찾았음. 

결국 아일라(김은자)와 슐레이만은 터키에서 재회하게 됨.

 

영화 <아일라>

"포화 속 생에 다시 없을 운명 같은 만남, 그리고… 60년간의 그리움 한국전쟁 참전병 ‘슐레이만’과 5살 소녀 ‘아일라’의 가슴 뜨거운 감동 실화!"

 

학도의용군(공식명칭)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한 의용병. 군대에 지원한 학생들이 3만여 명. 

학도의용군의 대부분은 10대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쟁에 뛰어든 학생들. 

포항여중을 지키고 있던 학도의용군.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 북한군의 침입. 

71명의 학생들이 포항여중에 주둔하며, 11시간 반 동안 북한군과 치열하게 맞서 싸웠음. 

몇 차례 교전 후 학도의용군의 존재를 눈치챈 북한군. 학생들에게 회유를 시도하는 북한군. 

하지만 학생들은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고, 교전을 시작. 하지만, 실탄 여유분이 부족한 의용군. 

북한군이 던진 수류탄을 주어 다시 던졌던 의용군들. 

병력이 부족했던 국군에 큰 한축이 된 학도의용군. 

 

포항시-학도의용군기념비

 

학도의용군 이우근 학도병이 어머니께 쓴 편지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하나요.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어머님, 상추 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 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님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일제, 태평양을 노리다. 

한반도에서 동남쪽으로 3,000km떨어진 서태평양에 있는 사이판(바로 옆은 괌). 

일본은 한 때 남양군도라고 부름. 

최초로 사이판을 점령한 16세기 스페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왕비 `마리아나`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나 제도`로 부름. 300년 넘게 사이판을 통치한 스페인.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이 괌을 제외한 북쪽 섬들을 독일제국에 매각!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패했던 독일령이던 남양군도를 일본이 점령.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에 가담해 출전했던 일본. 

1914년에 벌어지자마자, 일본은 단독으로 독일령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남.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만들어짐. 

(1920년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국제기구. 하지만, 제안자였던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 비준 동의거부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독일과 소련도 처음에는 가입을 거부당했다)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던 일본이 사이판을 위임통치. 

일제는 사이판과 조선을 중심으로 야망을 펼칠 준비. 

 

북마리아나제도(괌 제외) 사이판. 

북마리아나제도(서태평양 북쪽) 안 여러개의 섬 중 하나인 사이판.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는 로타섬, 티니안섬, 사이판섬 단 3개뿐. 

나머지 섬들은 대체로 무인도. 

사이판의 면적은 울릉도보다 1.6배 크고, 제주도의 6%크기 정도. 

평균기온 27도로 항상 여름 날씨를 유지.  

연중 기온 차가 가장 적은 장소로 기네스북 세계기록에 등재.

습도가 높은 편이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서 상쾌.

 

일제 아래 두 나라

사이판은 일본 통치 당시 `가라판마치`라고 부르며 약 1만 명의 주민들이 거주.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된`매일신보`에 기록된 일제의 사이판 점령.  

 

타포차우산(북마리아나제도 96950)

 

1차 세계대전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수백 년 전부터 꿈꿔온 대륙 진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가도(명을 치러 갈터이니 조선은 길을 비켜라). 

그 계획은 막은 이순신장군과 의병. 당시 여러 열강들이 조선을 노리고 있었는데,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이 발발(1894),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만을 차지. 그 후 10년 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가져감. 그 다음 해인 1905년 일본의 군사적인 이유로 독도 불법적 편입. 1910년 조선 강제병합(국권피탈). 조선을 차지하고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 이때다 싶은 일본은 영국과 손잡음. 영국과 독일이 전쟁 상태에 들어가자 일본은 독일에게 선전포고. 전쟁 후 설립된 국제연맹 이사회는 1920년 일본의 남양군도 위임통치를 결정. 거기서 멈추지 않고, 1931년 만주를 공격한 일본. 그 후 괴뢰국가 만주국 설립. 만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주길 원했지만, 국제연맹이 인정하지 않음. 그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탈퇴. 1932년 상해(상하이)를 폭격. 당시 미국, 프랑스, 영국이 상해에 엄청난 투자를 한 시기.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일본은 결국 1936년 아돌프 히틀러(독일)와 혈맹. 1937년 중국의 수도 난징을 공격(중일전쟁).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중국 침공에 나선 일본. 그 후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과 손잡은 일본도 참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의 다음계획은 중국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식민지화 하는 것(석유, 철강, 목재 등 풍부한 자원의 보고였던 동남아시아. 영국령 말레이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일본의 야욕에 맞서 미국이 시행한 ABCD봉쇄작전. 동남아시아의 이권을 가진 4개국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가 뭉쳐 일본에 대한 물자 수출(원유. 철강)을 전면 금지. 당시 일본은 원유의 80%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상황. 결국 경제적 타격을 받은 일본.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려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을 하기엔 거리가 너무 먼 두 나라.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려면, 항공모함을 전투기에 싣고 와야 가능. 당시 태평양에 배치된 항공모함은 총 3척. 그 항공모함을 무기력화 시키려한 일본. 결국 미국 하와이의 해군기지였던 진주만을 공습(1941년 12월 7일 새벽). `루스벨트 대통령은 오늘 아침 일본 전투기가 마닐라와 진주만을 공격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단 한 척의 항공모함도 없었다`.  공습 하루 전인 12월 6일 입항 예정이었던 엔터프라이즈호. 기상 문제로 입항 실패 후 12월 8일 진주만 입항. 참상을 목격한 윌리엄 홀시 제독(엔터프라이즈호 함장).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말이 될 것이다`. 중립국이었던 미국을 무참히 공격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를 꼐기로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일본의 계획적인 침공을 격퇴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미국은 정의 힘으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에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총 26개 연합국 결성.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대일, 대독에 선전포고. 엽합국 대 전쟁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등)의 대결. 미국은 항공모함에 폭격기를 싣고, 일본 인근까지 접근. 본토도 공격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운 일본. 이에 일본도 미국 본토를 치려 준비. 1942년 본토를 공격받은 일본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러 출정. 일본군의 공격 목표는 `AF`. 알류샨 열도(알래스카)로 침공할 것이라는 의견과 하와이 미드웨이로 침공한다로 의견이 갈림.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장군은 종합적으로 봤을 때 미드웨이로 침공할 것이다로 결론을 내림.  

 

1942년 5월 19일 미국 첩보대에서 제안한 작전은 미군끼리 거짓 암호를 주고 받는 것. 미드웨이섬의 해수 장치가 고장 났다며 식수가 부족하다는 긴급 보고를 내는 미군. 그 보고를 감청한 일본. 일본은 다시 `AF에서 식수가 부족하다`는 전보를 보내고 그 전보를 다시 미군이 감청.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은 항공모한 4척, 순양함 1척 침몰. 항공기 248기 손실 및 일본군 3,000여명 전사. 미드웨이해전은 미국의 승리로 끝남. 일본은 미드웨이해전을 기점으로 사이판까지 물러서게 됨. 최종방어선인 사이판. 타포차우산에서 미국의 총공세를 막아서던 일본. 미국은 결국 타포차우산을 점령. 일본군은 산 너무 북쪽으로 후퇴. 한 달 만에 완전히 소탕된 사이판은 미국의 점령으로 끝이 남. 티니안 섬에 일본이 사용하려던 비행장을 미국이 증설하고, B-29폭격기를 이용한 미국의 일본공습. B-29에 실려있던 것은 인류사상 최악의 무기. 핵. B-29는 실전에서 대량운용된 기종으로서는 가장 큰 2차대전기 항공기이자 세계 최초의 핵폭격기.

 

 

`일본군 항공기에 의해 폭격당한 오아후섬`. museumofworldwarii

 

 

📺MBC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 (Kore Ayla) 

다시보기(youtube)

 

📺선을넘는녀석들 43회

 다시보기 (웨이브 Wavve)

 

🌍선을넘는녀석들 리턴즈 관련 글

동학농민혁명(운동)/선을넘는녀석들 전북 고창편

선을넘는녀석들 리턴즈<안동>

 

*정보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생밀정ⓒLIFEEXO

reference 대한민국역사박물관(6.25전쟁),포항시블로그,포항시문화관광포털,우리역사넷,전쟁기념관,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googlemaps, museumofworldwari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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